반복되는 억압과 부유하는 자아: 우리는 어느 쪽으로 흘러야 하는가?_2017 남산예술센터 시즌작 <파란나라> 2017: 공연





남산예술센터 2017 하반기 시즌작: 세번째 작품



김수정 작/연출의 공연 <파란나라>는 어린 시절의 기억 갈피에 하나쯤 끼워져 있는 동요 <파란 나라>를 차용해 만든 작품이다. 2017년 11월, 극단 신세계와 남산예술센터는 이 작품을 두 번째로 무대에 올렸다. 

<파란나라>는 2017년 한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고등학교 CA 영화반 교실에서 펼쳐진다. 학생들에게 올바른 민주주의와 역사 의식을 가르치고 싶은 기간제 교사 '이종민'과 영화반 학생들이 등장한다. 이종민은 학생들에게 좋은 교사가 되고 싶지만, 되바라진 학생들과 학교 순위를 올리기에만 급급한 교장 사이에서 치이며 재계약조차 불투명한 그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전혀 통제가 되지 않는 교실에서 어쩔 줄 모르던 이종민은, 수업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에게 게임을 제안한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묘사된 나치의 독재에서 착안하여, 이종민을 "이종민 대장님"이라고 부르며 이종민을 우두머리로 삼아 다수결의 원칙에 따른 공동체를 시험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 시간 일찍 마쳐 주겠다"는 말에 학생들 다수의 동의를 얻어 시작된 이 게임은 이종민과 학생들의 공동체 "파란나라"로 발전한다. 시놉시스 소개는 이쯤 해두겠다. 이 연극은 머리 뒤를 묵직하게 때리는 섬뜩한 진행방식과 내용을 자랑하므로, 극장에서 직접 경험하는 것을 추천한다. 아쉽게도 전석매진을 기록했지만, 이 연극이 이대로 묻히지는 않을 것 같으니 다음 공연을 기다려 보시기를.


***이어지는 글은 공연의 줄거리를 다수 포함하고 있는 공연 리뷰입니다***


파란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 나라를 보았니 천사들이 사는 나라
파란 나라를 보았니 맑은 강물이 흐르는
파란 나라를 보았니 울타리가 없는 나라


꿈과 사랑이 가득하고 천사들이 살고 있는 나라, 맑은 강물이 흐르며 울타리가 없는 나라. 이 노래에는 모든 욕망이 충족되고 아무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 유토피아의 모습이 담겨 있다. 공동체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고 싶느냐는 이종민 선생의 질문에는 온갖 답변이 나온다. "오지고요 지리고요 레리꼬요" 등 현재 학생들 사이에서 '핫'한 유행어들이 줄줄이 나오는 가운데, 미나는 조심스럽게 "파란나라"를 제안한다. 새롭게 만든 이 공동체에서 미나가 바라는 것, 미나가 만들고 싶은 세상이 이 동요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노래를 불러 보라는 재촉을 받고, 미나는 힘이 잔뜩 들어간, 잠기고 거칠며 울먹이기까지 하는 목소리로 동요 <파란나라>를 부른다. 노래가 끝났을 때, 미나는 그 교실에서 처음으로 모두에게 박수를 받는다. 이종민 선생이 만든 "우리들의 공동체"는 이렇게 파란나라라는 이름을 얻는다. 지적장애를 가진 창현은 파란나라의 구호를 제정한다. 이것은 이 아이들이 교실이라는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인정받은 순간이다. 파란나라는 여기 속한 모든 학생들에게 그런 경험을 준다. 파란나라에 속했다는 이유로, 빵셔틀이었던 부잣집 아이 강호와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어 친구들의 껌 셔틀로 이용되었던 창현은 파란나라 친구들에게 보호받고, 동등한 친구가 된다. 파란나라는 교실에서 불안하고 힘들었던 학생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준다.

교실에서 학생들은 이름으로 불리고, 역할로 존재한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일진 형준, 공부를 잘하고 예뻐서 동경의 대상인 세인, 급우들을 통솔하는 힘이 있는 정화, 깐죽거리는 두준, 연예 기획사의 연습생으로서 학급 내에서 권력을 누리는 정윤 등이 이 교실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이들이다. 빵셔틀을 담당하는 강호, 모두의 기피의 대상인 창현 등이 있는가 하면 정윤에게 꼭 붙어 다니는 미르와 보경, 자발적으로 세인의 시중을 드는 미나가 있고, 오로지 아이돌 그룹에만 관심이 있는 지연과 늘 말을 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선기도 있다. 교실에서 모든 일은 서로 간의 관계와, 그 관계의 선을 타고 흐르는 힘의 역학에 의해 벌어진다. 힘이 없는 학생들은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늘 침묵한다. 얻어맞거나, 신발이나 껌을 뺏기거나, 조용히 책상에 앉아 다른 나라로 떠나거나, 수업이 끝나고 이 교실을 떠나기만을 목 뽑아 기다린다. 교실에서 이들의 존재는 지워진다. 아이들이 호명될 때는 그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이름이 불리거나 좋은 물건을 뺏기거나 스스로 누군가의 말에 맞장구를 칠 때뿐이다.

부유하는 자아

학생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지 못한다. 교실에서 이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법보다 감추는 법을 배우고, 관계를 얻지 못하고 관계의 기술만을 습득하기 때문이다. 미르가 정윤의 곁에 꼭 붙어 알랑거리거나 보경이 걸레 소리를 들으며 남학생들에게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하면서도 자발적으로 남학생들의 욕망에 어울려주는 것은 혼자 있지 않기 위해서다. 교실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고립되는 것이 자아를 억류당하며 불합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보다 더 두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늘 불안에 시달린다. 고립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힘이 있는 학생들이 힘을 과시하게 하고, 힘이 없는 학생들이 자기를 주장하지 못하게 한다.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만 행동하다 보면 자신의 욕망은 내세울 수 없는 것이 되고, 자신이 당하는 불합리한 일들은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예수의 십자가가 된다. 교실에서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 사람은 아마도 주영, 은정, 세인일 것이다. 이들은 우등생이자 모범생이다. 그러나 이들의 자아라고 해서 단단하지는 못하다. 신문방송학과에 가고 싶어서, 생활기록부에 적을 스펙이 필요해 영화반에 들어왔다는 주영은 스스로 신문방송학과에 갈 스펙을 쌓을 수 있는 길은 생각하지 못하고, '영화반'이라는 조직에서 선생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물어다 주기만을 기다린다. 스스로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신문방송학과를 향해 막연한 열망만 있을 뿐, 거기서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어떤 것이 필요한지에 대한 탐구는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세인은 파란나라가 이종민의 독재 아래 공동체와 다수를 강조하며 개인을 짓밟는 체제라는 것을 간파하고, 이 체제를 붕괴시키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뭉쳐진 다수의 이익과 힘 앞에서 개인의 힘은 미약하고, 고립된 세인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택한다. 

                파란나라를 비판했으나 고립을 견디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자신을 파란나라의 일원으로 받아달라고 비는 세인(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그러나 되풀이되는 억압

이종민 선생의 파란나라는 자신을 찾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학생들에게 평등한 관계를 제시하고, 학생들의 불안을 없애 준다. 학생들은 이러한 이종민에게 열광한다. 게임을 시작할 때 이종민이 제시한 원칙은 '다수결'과 '대장님 말에 복종'이다. 다수가 게임을 하고 싶어하니 이 교실에서는 게임을 해야 한다는 이종민의 말은 이제까지 한 번도 교실에서 자기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본 적 없었던 학생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선생님들의 의사 결정은 주로 공부를 잘하는 세인이나 주영, 은정의 말과 일치했는데, 처음으로 자신들의 의견이 힘을 얻은 것이다. 또한 손을 들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게 한 방식도 아이들을 흥분시켰다. 목소리가 크고 힘이 있는 학생들의 말이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며, 이종민 선생은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학생들을 지목해 말하게 하고 모두가 경청하고 박수를 치게 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학생들은 자신의 자아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그럼에도 비난받지 않는 경험을 처음 한다. 파란나라에서 학생들은 역할이 아니라 존재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 뒤로 이어지는 장면들은 섬뜩하다. 학생들은 교실 앞에 질서를 유지하는 가드를 세우고, 한 사람씩 차례로 앞으로 나가 자신의 콤플렉스를 고백하고, 더 나아지고 싶다는 소망을 말한다. 그것을 듣는 모두가 박수를 친다. 자신들의 불안의 뿌리를 더듬어 가는 이 과정은 스스로를 반성한다는 의미에서는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일사불란하게 이뤄지는 이러한 고백의 절차는 고백하지 않는 사람을 공동체에서 밀어내고 소외시킨다. 밤늦게 이종민 선생을 불러내 기습적으로 포옹과 뽀뽀를 한 미르가 파란나라 학생들에 의해 "처벌"받는 장면에까지 이르면 뒤통수가 서늘해진다. 미르는 모든 아이들이 보는 가운데 꿇어앉고, 아이들의 맞장구 속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것이 죄임을 스스로 선언한 다음 스스로의 뺨을 때리는 것으로 속죄한다. 속죄를 마치면 아이들은 미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널 용서할게"라고 말한다. 미르는 다시 집단에 받아들여지고, 이에 안도하며 자신의 죄를 더욱 깊이 참회한다. 

집단에 의해 강요된 이데올로기를 체화하고, 집단에 의해 처벌받으며 그 처벌을 자신의 손으로 행한다. 처벌을 직접적으로 가하지 않으면서 집단은 이 처벌의 자발성을 강조하고, 집단이 행하는 폭력을 은폐한다. 그러면서 다시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고, 개인의 개인성을 처벌한다. 파란나라는 파란나라가 존재하기 이전 교실에서 행해지던 폭력과 억압을 그대로 행하고 있다. 그들이 모두 연약한 자아를 가진 개인이었을 때는, 자신이 당하는 일에 대한 불합리함을 생각할 수 있었고 불의함에 분노할 수 있었다(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그렇기에 파란나라의 일원이 된 후 강호는 자신이 그 전까지 받아 왔던 억압과 불의한 요구들에 가져 온 분노를 표출했고 형준은 강호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집단이 된 지금, 개인의 자기반성은 사라졌다. 미르가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는 "이종민 선생님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집단의 이익이 개인의 욕망을 합법적으로 말살한다. 강호가 형준에게 대들 수 있었던 이유, 형준이 강호에게 사과하고 창현을 감쌌던 이유가 모두 같은 집단 파란나라의 일원이기 때문이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강호는 "같은 파란나라의 일원끼리 힘의 위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파란나라 공동체의 규율과, 규율에 기댄 파란나라 공동체의 승인을 등에 업고 자신의 불만을 표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파란나라는 관계의 역학이 존재하지 않는 평등한 사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 거대한 배타적인 집단을 형성한 것이다. 이들은 관용을 베풀지 않고, 개인 간의 관계를 말살해 버렸다.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세인은 과거를 참회할 테니 "받아달라"고, "파란나라는 모두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울부짖지만, 학생들의 대답은 "그래서 우리가 널 사랑했었잖아"다. 집단은 폐쇄적이며,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충족하기에 바깥을 향해 귀를 기울일 동기도 없다.


전국 파란나라 회원들이 모인 집회의 광기(사진 제공: 남산예술센터)

걷잡을 수 없는 광기: 관객석을 덮치는 파란 물결

세인의 자살 이후에야 이종민은 이 모든 일이 걷잡을 수 없어진 것을 깨닫고, 그것을 돌리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세인을 좋아했던 정화조차 세인의 자살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정화는 세인의 자살이 파란나라에게 잘못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고 자신을 합리화한다. 이종민은 집회에 모인 학생들에게 나치의 집회 영상을 틀어주지만, 학생들은 그것은 우리와 다르다고 소리친다. 학생들은 파란나라를 해체하려는 이종민을 살해한다. 이들에게 파란나라는 "대장님"을 죽여서라도 지켜야만 하는 가치가 된 것이다. 학생들은 울부짖는다.

"그럼 이제 우린 어떻게 해요?"

파란나라가 형성되고, 학생들을 보듬고, 점차 광기로 치달아 가는 과정에서 극은 관객들을 무대로 끌어들인다. 2017년의 <파란나라>가 초연과 달라진 점은 100명의 시민 배우들과 함께 극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남산예술센터의 원형극장형 무대에서, 흰 티셔츠를 맞춰 입은 파란나라 단원들은 객석에서 불쑥불쑥 일어나 무대로 들어간다. 관객들의 등 뒤에 반원 모양으로 늘어서서 음산한 목소리로 파란나라의 구호를 외친다. 바닥에 있는 무대와 등 뒤에 있는 파란나라 단원들 사이에서 관객은 어찌할 바 없이 파란나라의 광기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경쾌한 율동과 함께 백 명의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노래 파란나라를 부를 때는, 미나가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는 목소리로 울먹이며 노래할 때와는 전혀 다른 섬뜩한 전율이 느껴진다.

이 모든 일이 고립되지 않고자 하는 학생들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이 극의 비극이다. 이 비극성을 오래 고민하느라 리뷰를 쓰는 것이 늦어졌다. 우리는 모두 고립되지 않기를 바란다. 사회에 만연한 힘의 역학관계로 인해 고통받지 않기를 바란다. 만연한 폭력과 비난과 무시로부터 안전하기를 바란다. 이런 욕망이 파란나라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극을 파시즘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극으로 읽을 수가 없다. 이것은 개인의 자유와 존엄과 자존에 관한 극이다. 개인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파란나라는 교실의 이전 상태와 비교해 더 나쁜 상태로 이행했다. 그러나 파란나라 이전에도 개인이 받는 압박과 비자존, 비존엄은 이전과 같았다. 형태는 바뀌었지만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파란나라의 상태가 나쁘다는 데는 관객 모두가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파란나라 이전의 상태가 개개인에게 파란나라만큼 나빴다는 데에도 동의할 수 있다.

무질서하고 폭력으로 점철된 교실에서 파란나라로 바뀌는 흐름 속에서, 학생 개개인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피상적인 관계는 여전히 깊이를 획득하지 못했고 공동체 바깥의 사람을 소외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도 이전과 같다. 관계에는 방향성이 없고 미래가 없으며 현재만 존재한다. 자아를 내보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생각에 불안을 떨치고 안정감을 얻지만, 자아는 파란나라 속에 파묻혀 여전히 드러나지 못하고 부유한다. 서로의 약점을 공유하는 것으로만 동질감을 얻을 수 있고, 이전에는 불안 속에서나마 할 수 있었던 자기반성과 분노도 할 수 없게 된다. 파란나라가 존재하기 전부터 강호는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미르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파란나라로부터 비난과 처벌을 받았지만, 스스로 자신이 집단으로부터 비난과 처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벌을 준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교실 속의 작은 사회는 형태만 바꾸어 여전히 부유한다.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안전하고 안정되었다고 믿는 학생들은 여전히 불안 위에 서 있다. 그렇다면 이 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든 극은 주인공이 어디론가 이행해야만 끝나는 법이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 싶다. 그러나 아직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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